갑작스러운 이야기지만 한동안 다소 무거운 내용을 일기에 담으려고 한다.
지난 수 백개의 일기를 적어가며 가급적이면
가정 내 불화나 다툼은 언급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다툼과 불화가 없는 가정이 어디 있겠나.
누군가는 어느정도 다툼이 있는 편이 건강한 가정을 만든다고 했다.
그렇게 지난 수 년간의 생활을 우린 서로 참고 버텨왔나보다.
아내는 꽤 이전부터 화를 낼때면 이혼에 대한 얘기를 꺼냈었고
차츰 그 빈도는 더욱 잦아졌다.
나는 시종일관 극단적인 생각과 섣부른 판단은 시아를 위해서라도 잠시 보류하자
서로 더 노력해보자는 말로 개선의 여지를 우선으로 생각했다.
내 인생에 갑작스럽게 찾아 온 남편과 아빠라는 자리는 썩 익숙치 않은 것이었다.
제 앞가림도 어려워 결혼은 무슨.. 열심히 회사나 다니자던 내게
어느날 갑자기 시아가 나타났다.
아마 그 이후였던 것 같다.
남편으로서의 책임, 아빠로서의 사명감.
아빠는 아이의 놀이터가 되어야 한다.
돈 버는 기계보다 가정의 일원이 되자. 등등
과거의 나는 벗어던지고, 더 훌륭하게, 더 열심히, 끊임없이.
그렇게 내 나름대로의 목표치를 두고 완수를 위해 힘써왔다.
그것이 갑작스럽게 난관에 봉착한 내 인생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반면, 아내는 그렇지 않았다.
미래보다 현재를, 계획보다는 충동을.
마음가는대로 물 흐르듯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속 편한 가치관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코로나로 인해 회사를 장기간 휴직하고
집에 거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더욱 심해져 갔다.
그럴수록 내가 신경써야하는 영역은 더욱 넓어져 자체적으로 커버하기가 어려워졌고
그때마다 아내에게 집안일과 육아와 관련된 부분에
'부지런함', '성실함' 같은 것을 더 많이 요구했다.
나에겐 그것이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을 나눠서 수행하자는 HELP의 의미였지만
아내에겐 하나하나 잔소리로 들리게 된 것 같다.
더욱 힘들었던 것은 그렇게 아내가 집안일과 육아에 거리가 멀어지면서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게 집중되어 엄습해오는 지경이었고
그 모습을 바라본 시아는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우리집 일꾼이야, 청소꾼이야"
결국 그것들 앞에 내 자신도 서서히 무기력해지고,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비단 청소뿐만은 아니었다.
주말 이른 아침 시아를 보는 날이라면 힘들지만
말이라도 걸면서 놀아주거나 놀이터/공원 등 외출이라도 해보려는 나의 모습과 다르게
아내는 시아에게 간식과 TV를 제공하고 부족한 수면시간을 채우곤 했다.
놀아달라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는지
시아는 엄마는 놀아주지 않는다며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곤 한다.
그야말로 모든 책임과 역할이 포화되는 절박한 상황속에서도
한 가닥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여러 번 반복되는 이혼이라는 단어에 이제는 진절머리가 났다.
"그래. 그렇게 하자" 라는 말이 입에서 처음 나왔다.
억울했다.
나는 나의 모든 영혼까지 끌어모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로 인한 결과는 결국 실패로 돌아왔다.
내가 쌓아온 수 년간의 노력의 결실이 고작 이것 뿐인가?
1년 반이 넘도록 정신과 약물을 투여하고도 감당치 못할 것들을 감당해왔던
내 자신에게 오는 결과가 이것 뿐이란 말인가?
아무리 서로가 달라도 맞춰 갈 수 있다고 믿었지만
아주 잠시동안 허용하고 있었을 뿐, 다른 건 다른 것이었다.
그걸 억지로 맞추려고 했던건
내 허황된 욕심이었다는 생각에 짙은 허무감에 빠진다.
지난 반년 간, 공황장애 약을 끊고 이제야 건강을 느껴오던 나날
재발한 증상으로 끊었던 안정제를 다시 꺼내두었다.
그런 내가 몹시 안쓰러워보였는지
아직 6살밖에 안된 시아가 약봉투를 뜯어놓고
그 옆에 자기가 쓰는 컵에 물을 받아 가지런히 놓아 두었다.
나를 저렇게 끔찍히 생각해주는 착한 딸에게
내가 줄 수 있는게 고작 내가 겪었던 상처를 반복하게 만드는 것이라니
미안함과 죄책감에 꾹 눌러놓았던 감정이 눈과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진다.